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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미국작가가 왜 이탈리아어로 소설을 쓸까

외국어 고수 탐구

by 스노우필드 2020. 10. 1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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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필드의 polyglot 탐구] 1편

▵탐구대상 :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직업 : 작가
국적 : 미국
구사언어 : 영어, 벵골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外


최고 수준으로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외교관, 학자, 다개국어 배우... 많은 직업군이 떠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외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을 꼽고 싶습니다.
말로 하는 의사소통을 넘어서서, 문학적 표현까지도 외국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 말입니다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개국어 구사자를 꿈꿨던 사람으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을 동경해왔습니다. 그 중 한 명인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를 소개합니다.


■ 세계적 작가의 '외국어 망명', 이유는?

출처 neh.gov

1967년 영국 런던 출생. 벵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곧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드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바너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보스턴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같은 대학에서 르네상스 문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YES24 저자 소개 中

 
줌파 라히리는 33살에 단편소설집 <축복받은 집>(1999)으로 미국 퓰리처상을 수상한 뛰어난 작가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튜브에 올려진 인터뷰를 보면, 집에서는 부모님과 벵골어로 대화하고 집 밖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모국' 언어는 벵골어지만 영어보다는 구사력이 떨어진다고 하네요.
 
영어로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며 세계적 작가로 성장한 줌파 라히리는 2012년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해 이탈리아어로만 읽고 쓰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이 과정을 익숙한 언어에서 '망명exile'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탈리아어 학습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경험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주 3년 만인 2015년... 무려 이탈리아어로 쓴 산문과 단편소설을 모아 <In altre parole>을 출간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는 제목으로(이승수 역, 마음산책), 미국에서는 줌파 라히리 본인이 아닌 다른 번역자를 거쳐 <in other words>로 번역 출간됩니다.  

세계적 작가이니만큼 이탈리아어도 쉽게 배웠을 듯한데, 언어를 새로 배우며 느끼는 답답함과 막막함에선 예외일 수 없었나 봅니다.

"난 호수 기슭을 따라 헤엄쳤던 것처럼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 늘 내 주된 언어인 영어 옆에 바싹 붙어서 말이다. 언제나 이탈리아어 기슭을 맴돌기만 했다. 이런 방법으로 외국어를 공부하면 그 언어에 빠질 수가 없다. 또 다른 언어가 늘 옆에서 받쳐주고 구해주기 때문이다.

물 깊숙이 들어가서 빠지지 않고 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드려면 기슭을 떠나야 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팔을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선생님은 우리 집에 한 시간 정도 이탈리아어를 가져왔다가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
 선생님과 같이 있을 때에만 이탈리아어는 구체적이고 손에 닿는 듯했다."

 
영문판을 읽지는 못했는데, goodread.com에서 여러 quotes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발췌합니다. 이탈리아어에서 번역된 영문판도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습니다. 

“A new language is almost a new life, grammar and syntax recast you, you slip into another logic and another sensibility.”
“But when I come out of the woods, when I see the basket, scarcely a handful of words remain. The majority disappear. They vanish into thin air, they flow like water between my fingers. Because the basket is memory, and memory betrays me, memory doesn't hold up.”
"Why, as an adult, as a writer, am I interested in this new relationship with imperfection? What does it offer me? I would say a stunning clarity, a more profound self-awareness. Imperfection inspires invention, imagination, creativity. It stimulates. The more I feel imperfect, the more I feel alive.

그녀의 이탈리아어 공부 여정은 책 출간 직후 The New Yorker에 기고한 글에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5/12/07/teach-yourself-italian)

 

In Translation

Finding a new voice, in Italian.

www.newyorker.com

앞선 설명만 보면 3년 만에 외국어를 마스터하고 책까지 펴낸 괴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90년대 후반부터 20년 가까이 꾸준히 공부를 해왔던 것 같습니다. 첫 공부는 대학원생 시절 미국에서 독학으로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라틴어를 몇 년간 공부했기에 처음엔 수월했지만, 독학이 '한 번도 연주해보지 않은 악기를 공부하는 것'과 같아서 수업을 등록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2년을 학습해도 사전 없이는 소설을 읽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이탈리아어 책을 읽었을 때, 거의 모든 페이지의 모든 단어에 밑줄을 치고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고 해요. 왠지 익숙한 경험이죠? 외국어 공부하는 분들 한 번쯤은 다 겪어봤을 법한... 원서 읽기의 두려움!😢
 
이후 이탈리아 출판계와의 미팅에서 통역사 없이는 소통이 불가했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I can more or less follow the Italian, but I can't express myself, explain myself, without English. I feel limited"
"이탈리아어를 대략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영어(모국어) 없이는 나 자신을 표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한계를 느꼈다"

"I'm on the threshold, I can see inside, but the gate won't open"
"문지방에 서서 내부도 볼 수 있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줌파 라히리는 로마로 떠나기 6개월 전부터는 모든 활자를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만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어 원서를 느리지만 끝까지 읽었고, 로마에 도착해서는 이탈리아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엄청난 몰입으로 이탈리아어로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네요. 참고로 저 뉴요커 기고문 역시 이탈리아어로 썼고, 제3자가 영어로 번역한 글입니다. 세상에~;; 이탈리아어를 향한 엄청난 집념이 느껴집니다. 특히 '쓰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 듯 합니다. 역시 원서읽기와 일기쓰기는 만국 공통의 공부법인가 봅니다. 


■ "언어를 배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일"

www.youtube.com/watch?v=9w_xnNZTpu4

이탈리아어 인터뷰 / 출처 : iItalyTV 

https://www.youtube.com/watch?v=rfLVFwAl6PU

영어 인터뷰 / 출처 : Penguin random house audio

유튜브에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 학습에 대해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인터뷰한 영상을 여러 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작가가 영어로도 신중하게 말하는 편인데 이탈리아어 인터뷰에서도 그런 모습이 엿보입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인터뷰 내용 한 줄을 공유합니다. 
 
"I Think, learning a language is the most profound thing we can do. 
…… I fell in love with the language and 20 years later it sort of changed my life.
I
t gave me a new life and I felt reborn as a person, as a writer, so it was calling me."

줌파 라히리는 <in altre parole> 이후에도 산문집 <책이 입은 옷>, 소설 <내가 있는 곳>을 이탈리아어로 써냈습니다. 저의 외국어 공부에 대한 의욕 혹은 집착이 한국사회의 자기계발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마다, 주위에서 "외국어는 회사 통역사한테 맡기면 되는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해?"라고 핀잔을 줄 때마다, 자기 자신을 이탈리아어라는 제3의 언어로 밀어넣었던 줌파 라히리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응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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